칙칙한 흑색 하늘에서 빗방울들이 뛰어내리고 있다. 연약한 그네들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촉촉한 비명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다. 이 방의 주인은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창문을 활짝 열어뒀고 그 덕에 창가와 주변 바닥이 물기로 가득하다. 창문을 닫아 줄까 싶었지만 빗물이 이따금씩 튀어 들어오는 꼴이 보기 좋다고 생각돼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보고 있자니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 같다. 편안한 물구경을 위해 자세를 바꿔 눕자 딱딱한 것이 옆구리를 찔렀다. 뭔가 했더니 그 동화 나부랭이 노트다. 더러운 노트. 찝찝한 노트. 불쾌한 노트.
침대에 누워서 너덜거리는 노트를 펼쳐 본다. 이 노트에 적힌 '동화'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제 역할을 못한다. 똑 '그 여자'처럼. 어디 하나 멀쩡한 글이 없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런 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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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볼펜 소녀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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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0일. 날씨 -
오늘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니까 오늘이 0일!
오늘이 바로 너의 생일이란다. 생일 축하해, 일기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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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2일. 날씨 -
오늘은 앉아있는 내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왔어. 물장구치는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더라.
오히려 재밌던걸? 네가 종이만 아니었다면 함께 놀았을 거야. 분명 즐거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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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5일. 날씨 아마도 맑음
물이 헤엄쳐도 될 정도로 차올랐어! 가끔씩 잠수를 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많은게 다르게 보여.
마치 네가 물에 젖어 글자의 잉크가 번지듯이 변화가 찾아오지. 다행히도 난 잉크가 아니라 물에 녹지 않아!
맞아, 정말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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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21일. 날씨 모르겠음
투명하던 물이 점점 뿌옇게 변하고 있어.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썩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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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38일. 날씨 역겨움
이젠 물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탁해졌어. 질척거리고 새카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즐거워. 그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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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44일. 날씨 까맣다
내게서 까만 게 묻어 나오고 있어. 상처가 났나 봐. 검은 게 흘러 나오고 있어. 이제 물은 없어.
여기엔 흘려 보내는 나와 흘러나온 나만 있어.
그리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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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일. 날씨 높았다
언제부터였지? 꼬챙이에 꿰뚫려서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어.
그런데 내가 조금 무거웠나 봐.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와서 오늘 땅바닥에 발이 닿았어.
구멍이 조금 큰가? 네가 보기엔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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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날씨 죄송함
아... 실수로 네 위에 잉크를 토해버렸어. 미안해. 또 잘못을 저질렀어. 어떡하지?
너와의 추억이 같잖은 내 잉크로 더럽혀졌어. 언제나 이렇게 죄를 저지르고 말아.
모두 다 내 탓이겠지? 맞아, 내 탓이야. 내가 잉크같은 걸 담고 있는게 잘못인거야.
내가 틀려먹어서 그래. 내가 그릇돼서 그래.
내가 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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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날씨 -
내 더러운 피를 모두 게워냈어.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니까 일기를 쓸 수가 없더라. 하하.
그런데.
일기를 쓸 필요가 있을까? 난 왜 일기를 쓰고 있었지?
어차피 너도 날 필요로 하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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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날씨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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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33333333333333333
어차피 다 무의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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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일 날씨 좋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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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 후론 하얀 공백-상실-결핍만이 이어졌죠.
오늘도 일기장은 바람에 몸을 맡깁니다.
촤라락, 촤라락. 자신을 끄적이던 누군가를 그리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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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딴 식이다. 이 구질구질한 노트에 적힌 글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불쾌하고 사람의 기분을 망쳐놓는 힘이 있다. 고개를 살짝 돌려서 바라본 창 밖은 여전히 칙칙하게 물을 흩뿌리고 있다. 노트의 모퉁이를 잡고 창가를 겨냥했다. 포물선으로 날아갈 거리를 계산하듯 손을 까딱거리기를 몇 번. 문득, 그것마저 귀찮아져 팔이 침대로 나동그라졌다. 날아가지 못한 네모난 탄환도 함께 널부러졌다. 그렇게 널부러진 채로, 창밖을 바라보는 채로, 한동안 누워있기만을 계속 했다.
알아 들을 리 없는 빗방울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