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한 흑색 하늘에서 빗방울들이 뛰어내리고 있다. 연약한 그네들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촉촉한 비명소리가 사방에 가득하다. 이 방의 주인은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창문을 활짝 열어뒀고 그 덕에 창가와 주변 바닥이 물기로 가득하다. 창문을 닫아 줄까 싶었지만 빗물이 이따금씩 튀어 들어오는 꼴이 보기 좋다고 생각돼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보고 있자니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 같다. 편안한 물구경을 위해 자세를 바꿔 눕자 딱딱한 것이 옆구리를 찔렀다. 뭔가 했더니 그 동화 나부랭이 노트다. 더러운 노트. 찝찝한 노트. 불쾌한 노트.
침대에 누워서 너덜거리는 노트를 펼쳐 본다. 이 노트에 적힌 '동화'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제 역할을 못한다. 똑 '그 여자'처럼. 어디 하나 멀쩡한 글이 없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런 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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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볼펜 소녀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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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0일. 날씨 -
오늘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니까 오늘이 0일! 
오늘이 바로 너의 생일이란다. 생일 축하해, 일기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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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2일. 날씨 -
오늘은 앉아있는 내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왔어. 물장구치는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더라.
오히려 재밌던걸? 네가 종이만 아니었다면 함께 놀았을 거야. 분명 즐거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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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5일. 날씨 아마도 맑음
물이 헤엄쳐도 될 정도로 차올랐어! 가끔씩 잠수를 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많은게 다르게 보여.
마치 네가 물에 젖어 글자의 잉크가 번지듯이 변화가 찾아오지. 다행히도 난 잉크가 아니라 물에 녹지 않아!
맞아, 정말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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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21일. 날씨 모르겠음
투명하던 물이 점점 뿌옇게 변하고 있어. 냄새도 나는 것 같고. 썩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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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38일. 날씨 역겨움
이젠 물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탁해졌어. 질척거리고 새카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즐거워. 그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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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 44일. 날씨 까맣다
내게서 까만 게 묻어 나오고 있어. 상처가 났나 봐. 검은 게 흘러 나오고 있어. 이제 물은 없어.
여기엔 흘려 보내는 나와 흘러나온 나만 있어.
그리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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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일. 날씨 높았다
언제부터였지? 꼬챙이에 꿰뚫려서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어.
그런데 내가 조금 무거웠나 봐. 조금씩 미끄러져 내려와서 오늘 땅바닥에 발이 닿았어.
구멍이 조금 큰가? 네가 보기엔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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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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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리▉▉머리▉▉▉▉▉▉찢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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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박살났▉면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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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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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날씨 죄송함
아... 실수로 네 위에 잉크를 토해버렸어. 미안해. 또 잘못을 저질렀어. 어떡하지?
너와의 추억이 같잖은 내 잉크로 더럽혀졌어. 언제나 이렇게 죄를 저지르고 말아.
모두 다 내 탓이겠지? 맞아, 내 탓이야. 내가 잉크같은 걸 담고 있는게 잘못인거야.
내가 틀려먹어서 그래. 내가 그릇돼서 그래.
내가 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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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날씨 -
내 더러운 피를 모두 게워냈어.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니까 일기를 쓸 수가 없더라. 하하.
그런데.
일기를 쓸 필요가 있을까? 난 왜 일기를 쓰고 있었지?
어차피 너도 날 필요로 하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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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날씨 3
33333333333333333333
33333333333333333333
33333333333333333333
어차피 다 무의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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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일 날씨 좋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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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 후론 하얀 공백-상실-결핍만이 이어졌죠.
오늘도 일기장은 바람에 몸을 맡깁니다.
촤라락, 촤라락. 자신을 끄적이던 누군가를 그리면서요.
>

늘 이딴 식이다. 이 구질구질한 노트에 적힌 글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불쾌하고 사람의 기분을 망쳐놓는 힘이 있다. 고개를 살짝 돌려서 바라본 창 밖은 여전히 칙칙하게 물을 흩뿌리고 있다. 노트의 모퉁이를 잡고 창가를 겨냥했다. 포물선으로 날아갈 거리를 계산하듯 손을 까딱거리기를 몇 번. 문득, 그것마저 귀찮아져 팔이 침대로 나동그라졌다. 날아가지 못한 네모난 탄환도 함께 널부러졌다. 그렇게 널부러진 채로, 창밖을 바라보는 채로, 한동안 누워있기만을 계속 했다.
알아 들을 리 없는 빗방울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Posted by 약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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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의 로제리, 요약 갑니다~!

평범한 고등학교 4학년(재수생ㅎ)이었던 김**은 갑작스럽게 이세계로 소환된다! 갑작스런 이세계 소환도 모자라서... 뭐?! 여자아이의 몸이 되어버렸다구~?! 말도 안돼~~!!
하지만, 상황(과 자신의 몸)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덩치 큰 남자에게 붙잡혀 간 그는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이쪽 세계에서 빈곤하고 어린 가정부, '로제리'가 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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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이-발..."
어린 소녀의 입에서 찰진 욕지거리가 뱉어져 나왔다. 소환 이전의 소녀가 어땠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찌됐든, 어린 가정부 로제리는 오늘도 힘차게 입이 마르도록 욕을 중얼거리고 있다.
"뭔 놈의 집구석이 시장도 이렇게 멀고, 시발... 무거워. 집주인놈은 왜 갑자기 멜론을 처먹고 싶다고... 아오!"
이것저것 떠오르는 족족 로제리의 작은 입은 그것들을 물어뜯고 되는 대로 씹어서 걸은 언어로 뱉어냈다. 이쪽 세계로 넘어온 지도 얼추 1개월이 지났다. 그간 꽤 많은 것을 깨달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이고 ― 이젠 '로제리'가 된 그의 말마따나 ― 좆같은 것들이었다.
소녀 로제리, 그녀는 어느 저택에 가정부로 머물고 있는 아이였다. 가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고용인들의 반응을 떠본 바로는 없는 듯했다. 근무 환경(이라 해야할지 주거 환경이라 해야할지 모르겠지만)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집주인의 변덕으로 갑작스런 심부름을 가야할 때 가장 막내인 자신이 수고해야 한다는 점은 싫지만, 나머지는 그냥 저냥 평범했다. 오히려 고용인들과의 친분이 이미 어느 정도 있어서 편하다면 편한 면도 있었다. 그 '익숙함과 편안함'조차도 좆같은 것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랄까.



"하하하, 이번엔 '이세계인'이야? 재밌네~." 
이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다가 겨우 얌전해진 ― 로제리에게 익숙히 대꾸한 남자는 '라비주니어 다크젤'이란 이름의 고용인이었다. 라비는 '로제리'가 된 후 가장 처음 만난 고용인으로, 건강미가 느껴지는 흑갈색 피부와 은빛 단발이 인상적인 훤칠한 청년이었다. 특히 라비의 은발은 꽤 인상 깊었다. 그도 그럴게, 그는 자신을 들쳐 메고 가는 라비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한동안 대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네. 지금, 이 자세."
덜렁덜렁 라비의 어깨에 메여있는 로제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널 이렇게 메고 다닌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로제리씨네 세계 이야기는 아직입니까?"
라비는 묘하게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답을 하며 어깨에 올려진 로제리의 등허리를 토닥였다. 그것이 안심을 독려하는 건지 이야기를 재촉하는 것인지 헷갈렸지만, 로제리는 대충 후자로 받아들이고 '저쪽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그 자체를 설명한다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로제리는 더욱 신중을 기해서, 말그대로, '진실'을 진실되게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이어진 라비와의 대화(라는 이름의 설득)는 로제리에게 이쪽 세계뿐만 아니라 본래 살고 있던 세계에 대해서도 새로이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었다. 사고를 언어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명확해지는 것들은 많다. 가령 예를 들자면...
"네 원래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항국'에서 뭘 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고, 네가 말하는 최신 기술이라는 건 마법으로 다 가능한 것들이고... 이번 이야기는 허술하다, 로제리!"
"..."
라비는 그렇게 '빈틈투성이 망상'으로 치부하며 소탈하게 웃었지만 로제리는 침묵 깊이 가라앉아 자신의 기억을 추궁하고 있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당연히 있어야 할 '기억'들이 훼손되어 있었다.
부모의 얼굴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 애시당초 학교를 다니긴 했었는지 의문스럽다. 무엇 하나 또렷한 이미지가 없다. 로제리의 기억은, 그 기억의 몰골은, 어린 아이가 엉터리로 만든 헝겊 인형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로제리는 자신이 그저 '기억의 모순을 발견하고 놀란 기분' 밖에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질겁했다. 나는 그토록 현생에 애정이 없었던 것인가? 이토록 자신의 삶에 애착이 없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기묘한 감정이 흐르는 정적. 로제리의 침묵이 자신의 타박 탓이라고 느껴진 것일까. 라비는 로제리 향한 혼잣말로 정적을 밀어내려 했다.
"그래도 이번엔 위험해 보이지 않는 컨셉이라서 다행이야. 검은마법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심정도 이해는 하지만... 솔직히 너만큼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하하."
"..."
"생각해보면 코케트도 심술궂어. '검은마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책에 적힌 걸 알려주고, '나는 로제리를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대해주고 있을 뿐이야' 라니... 정작 책임감이 필요한 건 코케트라구."
"..."
"난 솔직히 '악마를 소환'하러 갔다길래 혹시나 싶어서 싸울 준비도 했는데, 다행히 실패했나 보구나."
라비는 허리춤에서 탈칵거리는 검집의 흔들림과 로제리의 무게를 음미하며 안심하는 미소를 지었다.
"...검은...마법? 악...마, 뭐?"
침묵 속에서 자맥질하던 로제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대체 —————.
한 순간이었다. 라비의 발 밑에는, 정말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도, 바나나 껍질이 놓여있었고 라비는 힘찬 발걸음으로 그것을 밟았다.
미끄덩, 콱.
라비는 우스꽝스러울만큼 뒤로 고꾸라졌고 로제리 또한 그 촌극을 피하지 못했다.
지면이 들이닥친다고 착각한 로제리는 그 착각을 깨닫기도 전에 안면을 그대로 흙바닥에 꼬라박았다. 어느 정도의 높이와 어느 정도의 무게, 어느 정도의 속도가 어우러져서 그녀의 얼굴을 흙알맹이로 갈아내버렸다. 코뼈를 시작으로 으스러지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은 피와 살점과 몇 개의 이빨을 튀기며 함몰했다. 그러고도 만족되지 못한 충돌의 여파는 그녀의 경추를 짓이기며 박살을 내고, 목을 비틀어 접고서야 잦아들었다. 땅에 꽂힌 얼굴은 그대로 둔 채, 넘어진 라비의 몸과는 반대로 로제리의 몸이 발라당 넘어졌다.
그녀의 목에서는 단말마의 비명 대신 '뿌드득' 거리는 어그러진 소리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로드' 하시겠습니까?》
전신의 상실감과 두부 전체를 감싸는 죽음의 촉감, 붕괴에 가까운 고통 속에서 너무나도 생뚱맞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라기보단 잊혀졌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온 듯한 감각, 하지만 그 명료함과 선명함이 '목소리'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 목소리의 울림이 로제리를 휘감아 옥죄고 있던 고통을 서서히 지워냈다. 얼떨해 하는 로제리에게 모든 상황을 재차 확인 시켜 주듯 목소리는 한 번 더 울려퍼졌다.
《'로드' 하시겠습니까?》
〈...예.〉
선택 없는 선택지를 들이밀고 있다. 어디선가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 싶었는데, '야간자율학습' 신청서가 비슷한 맥락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있는데 왜 귀찮게 물어보는 걸까 싶은건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는 기분이다.
〈'로드 하실거잖아요?'라고 물어보지 그러냐.〉
그런 로제리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이 목소리는 수순을 따라 진행을 요구할 뿐이었다.
《로드하겠습니다. '로제리, 리셋해' 라고 말하십시오》
'왜 로드를 하는데 리셋이라고 말하라는 걸까.' 같은 의문이 스쳐지나가고, 로제리는 ― 정확히는 그녀 안에 있는 그는 ― 요구받은 대답을 돌려준다.
〈'로제리, 리셋해.'〉
《리셋》


아무 것도 아니었던 무無가 로제리라는 그릇 안에서 의미를 돌려받고 생명을 되찾는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다. 적당히 말하자면 로제리 모양 튜브에 정신이 빨려들어가서 부풀어오르는, 그런 감상을 느끼게 하는 부활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로제리는 확신했다.
"저쪽에서 넘어 왔던 곳이구만."
기억의 혼란은 커녕 위화감 마저 없는 너무나도 안정적인 부활. '어디서 이런걸 사망귀환이라고 하던데 나도 그렇게 부를까?' 같은 실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라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리!"
아, 그랬었다. 라비는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들어서 검은마법을 방해하려 했었다. 건장한(그리고 낯선) 남자의 저돌적인 달리기는 쪼만한 소녀의 눈높이에선 흉흉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로제리는 도망쳤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라비! 기다려 봐! 내가, 뿌어억!!!"
지금이라도 라비의 돌진을 막을 수는 없었나보다. 라비는 마치 지금이라도 당장 로제리의 발 밑에 있는 폭발물이 터질 것 같은 기세로 달려들어 풀밭으로 다이빙했다. 물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새들의 지저귐조차 멎은 숲의 정적 속에서 로제리는 말했다.
"내가... 내가 터질 뻔 했잖냐."

"아~ 정말 무사해서 다행이야."
숲길을 걸어가며 라비는 연신 안도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로제리의 손을 잡고 있는 라비의 손도 감정을 표현했다. 혹시나 도망칠 것을 염려한 라비는 로제리를 업고 가려 했지만 로제리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손을 잡고 가는 것' 정도로 타협을 봤다. 기쁨과 안도로 씰룩대는 청년의 손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을 믿지 않더라도 이야기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가 구하고 싶었던 로제리가 아니야.' 그런 마음으로 로제리는 입을 열었다.
"라비."
기쁨이 묻어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라비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로제리를 돌아봤다. 무구한 미소가 갈고리처럼 로제리를 꿰었다. 전달해야 할 진실과 함께 끌어올려진 것은 방향 모를 미안함이었다.
"내 말, 믿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얘기해야만 하고! 그리고... 믿어 주길 바라."
로제리의 진지한 어조에 라비는 걸음을 멈추고 로제리를 향해 돌아섰다. 그렇게 돌아서서 바라보는 라비의 온화한 시선이 거북하여 로제리는 눈을 돌리고 잡고 있던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라비는 쥐고 있던 손 끝을 지그시 누르며 그것을 막았다. 그 손 끝에서 전해지는 건 도주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신뢰감. 막역한 유대와 신뢰가 로제리의 가슴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로제리는 고통의 몸부림치듯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감정마저 터져나와 진실을 내질렀다.
"난 너가 알고 있던 '로제리'가 아니야! 아예, 아예 이 세계의, '래즈카이'의 사람이 아냐! 터무니 없다 생각해도...! 난, 난 로제리가...!!"
거칠게 떨려오는 호흡에 말이 끊어졌다. 벅찬 호흡과 함께 열기가 얼굴을 덮친다. 이윽고 뜨거운 열기가 간지럽게 방울져서 소녀의 뺨을, 흙바닥을 적셨다. 눈물에 가장 당황한 건 로제리 본인이었다.
"어라...?(훌쩍) 나 울어?(쿨쩍)"
만화에서나 보던,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에 놀라 두 눈을 소매자락으로 누르는 로제리의 머리 위로 라비의 손이 올라왔다.
"로제리 말이면 믿지.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 라비의 손은 조금씩 움직였다. 쓰다듬듯이. 타이르듯이. 어르듯이. 토닥여 주듯이.
"이 멍청아! 그러니까 난 로제리가 아니―――!
로제리는 머리를 쳐들며 라비에게 대꾸하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로제리의 발 밑에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지만, 바나나 껍질이 놓여있었다. 로제리는 '바나나를 밟은 것'이 되었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미끄덩, 꽝.

'잠에서 깨어날 때면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것 같다'는 서술을 종종 책에서 본 적 있었다. 로제리(가 된 그)는 오늘 처음으로 그런 기분을 느꼈다. 폭풍우가 뒤흔드는 깊은 바다에서 간신히 떠오르는 '그런' 느낌.
"푸헥! 컥, 푸하-악!!"
숨통이 원하는 것을 거칠게 들이키며 벌떡 일어난 로제리의 몸은 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코로 물이 들어가 콜록대는 로제리의 옆엔 한 소녀가 서있었다. 소녀는 권태스런 표정으로 로제리를 내려다보다가 '이제야 일어나네.'라 말하며 들고 있던 물통을 적당히 바닥에 팽개쳤다. 나무로 된 벽에 슬쩍 기대 선 소녀는 기침이 잦아들지도 않은 로제리에게 대뜸 말을 걸었다.
"야. 너 누구야?"
로제리와 소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허름한 창고, 마주보는 소녀는 창문의 빛을 비스듬히 등지고 있었다. 소녀의 검붉은 머리칼이 빛을 머금고 새빨갛게 반짝인다. 소녀의 농회색 눈이 그림자 속에서도 빛나는 것 같다. 불꽃을 품은 잿더미, 그것이 그 소녀의 첫인상이었다.
로제리는 소녀에게서 눈을 돌리고 축축히 젖은 담요를 쳐다봤다. 아직도 끼얹은 물이 몸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턱 언저리에 맺힌 물방울조차 더이상 떨어지지 않을 때쯤 로제리는 겨우 입을 열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누군지."
"...좋아."
그렇게 말한 소녀는 일어나서 지푸라기가 뒤섞인 잡동사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건가?' 하고 꺼낸 물건을 뒤로 던지길 두어 번, 불쑥 꺼낸 것은 거무튀튀한 한 권의 책이었다. 책에 붙은 지푸라기를 툭 털어내곤 곧장 책을 펼친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다 촤라락 넘기고, 앞으로 되돌아가길 몇 번. 소녀의 손가락이 멈췄다가 문장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8장 악마 소환 마법. 소환 마법 중에서도 악마 소환은 고도의 기술과 섬세함을 요하는 고등 마법이다... ... 악마 '스타페스 엑시디움'. 이 악마의 주식은 시간이다. 사역을 하게 된다면 스타페스 엑시디움의 시간 섭취를 조절하여 시간을 다루는 것이 가능해진다. 허나 스타페스 엑시디움은 영악하기에 사역에 성공했다하여 주의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 사역자의 시간을 몰래 훔쳐 먹어 노화로 죽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 혼이 달아나지 않은 생물의 붉은 피... 육체에 묶인 영혼... 도마뱀꼬리, 양파, 당근 어쩌고저쩌고."
텁, 책을 덮으며 소녀는 "이거네."라 말했다.
"뭐가... 이거라는 거야...?"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한 직후부터 로제리는 또다시 혼란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소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기는 했지만 그저 눈만 뜨고 있었을 뿐 넋을 놓고 있는 상태였다. 해서, 소녀의 낭독 또한 들리지 않았다.
"네 이름. 스타페스 엑시디움 일거야."
"아- 아니, 아냐. 내 이름은 김... 김 뭐시기였다고."
"그럼 김 스타페스 엑시디움인가 보네."
"아냐, 맹세코 그건 아냐!"
소녀는 로제리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창고 구석에 책을 두더니 잡동사니들을 발로 걷어차서 책을 숨겼다.
"어쨌든 내 이름은 코케트야."
소음과 함께 피어난 먼지를 피해 몇 걸음 물러선 코케트는 잡동사니와 먼지로 뒤덮힌 창고 한 켠을 바라보며, 그렇게 고했다.



'뭐 이딴 지랄'(오르막길)을 오르며 '좆같은 초록색'(멜론)을 들고 '그지같은 시부럴'(저택)으로 향하던 로제리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무시하고 싶어도 헬스장의 덜덜이가 생각나는 이 무지막지한 진동은 무시할 수가 없다. 양손의 짐을 내려놓을만한 길가에 멈춰서서 '전가기'를 꺼냈다. 이름만 조금 다르지 그냥 전화기다. 대부분의 어휘는 이전과 똑같은데 가끔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다른 어휘가 사용되곤 한다. 아주 제멋대로인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나 지금 오르막..."
`주인어른의 기분 변경~. 멜론에서 무화과로 변경. 그럼 수고.`
대화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통화였지만, 납득한다. (주인어른의 기분이 또 바뀌기 전에)빠르게 다녀올 수 있게 해주는 코케트 나름의 배려(?)인 것이다. 허나 그것이 허망함을 달래 주진 못한다. 한숨 한 번, 욕 한 번, 다시 욕 한 번.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고 로제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상쾌함이 느껴지는 맑고 푸른 하늘은 포근한 햇살로 가득하다. 나쁘게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렇게 좋은 날씨, 산책할 시간이 늘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렇게 받아들이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거웠던 짐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작은 미소를 한 입 물고 다시 시장을 향해 내려간다.
미소에 화답해주 듯, 멜론도 언덕길 아래에서 박살난 두 쪽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그래, 나도 반갑다. 이 좆같은 세상아."
베어 물고있던 미소에선 떫은 맛이 났다.



Posted by 약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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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틈새로 보이는 밖은 분명 방 안보다 밝았다. 저 빛이 저녁의 어스름인지 새벽의 여명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벌어진 틈새로 보이는 하늘이 예뻐서 벽에 기대앉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쪽빛으로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조금 왼쪽으로 돌렸다. 한때는 저 하늘처럼 아름다웠을 푸른색 양장 노트. 이제는 닳고 해져서 과거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어쩌면 지금 모습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는지 모르겠다.
쭈그리고 있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서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이 의자와 이 방, 이 오래된 노트의 실제 소유자인 그 여자는 근방에서 알아주는 '정신병자'다. 그런 그녀가 취미로 삼고 있는 '동화 집필'은 대표적인 악취미 중 하나로, 읽는 사람을 위한 배려는 커녕 언어를 위한 배려가 필요하다 싶을 만큼 무위하다. 무슨 글들을 그렇게 적어 온 것일까. 노트를 집어 한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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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정도면 원망해도 되쥬?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달팽'이라고 해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자신을 달팽이라고 소개하며 민달팽이가 물어보았어요. 듣는 쪽도 싫지는 않은지 거절하지 않네요. 달팽은 기쁜 맘에 꼼질거리며 옆자리에 앉았답니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이 있어야 신나는 법이니까요.
"저는 숲 속에서 왔어요. 그리고 여느 숲처럼 다양한 친구들과 함께 지냈답니다. 토끼, 고라니, 사마귀, 연가시, 개, 심장사상충, 페킹 덕, 소라게, 달팽이... 그리고 저. 민달팽이."
그리고 민달팽이의 소개에 맞춰 배우(대역)들이 인사를 하며 무대에 오릅니다. 어디까지나 상상 속의 무대지만요.

막이 걷히고 달팽의 해설이 시작됩니다.
@: 이 곳은 숲 속 친구들이 모여 살고 있는 '싹 난 감자 숲'. 많은 동물들이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 숲이죠.
무대의 오른편에서 슬금슬금 민달팽이와 소라게, 달팽이가 등장합니다.
민달팽이: 아. 너무. 장된다. 이. 처음이야.
달팽이: 맞아나도이렇게큰숲은처음이라서긴장돼. 그나저나우리서로잘지내자.
소라게: 그래!! 악수, 아니, 우리 모두 잘 지내자!! 악수하자!! 미안! 니들 손이 없네!
배우들의 연기 실력이 형편없네요. 상상 속 무대인데 왜 이 모양일까요? 엉성한 대화를 나눈 세 명은 무대의 왼편으로 걸어가지만 신기하게도 제자리걸음입니다. 무대 바닥의 벨트가 움직이고 있었네요. 무대의 왼편에서 스르륵, 앉아있는 동물 무리가 나타났어요.
토끼: 역시 한 끼 식사엔 페킹 덕이 최고야!
고라니: 인정.
개: 그러니까 말야. 어우, 근데 너무 급하게 먹었나... 수, 숨이...
심장사상충: 갠자너, 갠자너~. 걱정말고 팍~팍 먹어.
사마귀: 난 이 친구가 처음부터 좋았어! 역시 도시에서 온 놈은 맛이 달라!
연가시: 사마사마. 고기 먹으면 물 마시고 싶어지지 않아?
사마귀: 어, 어? 그런...가?
@: 숲 속 친구들은 배가 고프면 친구를 먹기도 했답니다. 먹이 사슬이란게 그런거죠, 뭐.(웃음)
민달팽이와 새로 온 친구들은 쭈뼛쭈뼛 그 무리로 다가가고, 무리 중 몇몇이 함께 하자는 제스쳐를 취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무대는 페이드 아웃.

팟! 어둠을 도려내고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무대의 중앙을 비춥니다. 그 안에 동물 친구들이 서로 대화하고 있네요.
@: 저는 숲 속 친구들중에서도 이 네 명과 친했답니다. 소라게, 달팽이, 연가시, 심장사상충. 특히 달팽이는 제 남자친구였죠. (갑자기 당황하며) 아아, 제가 지금은 남자지만 그 땐 암컷이었어요. 그, 왜, 달팽이들은 자웅동체니까요. 아하,하하하...(괜히 헛기침을 한다)
객석에서 웃음 소리가 들리네요. 배우들도 조금 웃는 것 같아요. 이내 소라게와 달팽이는 퇴장하고 민달팽이가 밝은 원 안으로 들어왔어요.
연가시: 아, 팽! 왔어? 여기 앉아. (달팽이와 소라게의 뒷모습을 흘깃보며) 어우, 난 껍질있는 애들은 싫더라.
심장사상충: 그러니까 말야. 뭔가 말이 안 통해. (민달팽이를 보며) 너는 우리한테 고마워해라. 우리처럼 잘해주는 숲 속 친구 없어~. 기야, 아니야?
민달팽이: (촉각을 끄덕이며) 네에...
연가시: (몸을 수그리고 속닥거린다) 그리고 이건 우리 셋만의 비밀인데... (잠시 뜸을 들이곤) 소라게, 쟤. 바다 출신이래~! 완전 소름 돋지 않냐?
민달팽이: 아~아...그러게요. (살짝 황당한 표정으로) 그런데 연가시씨.
연가시: 응?
세 친구의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어요. 이윽고 완전히 밝아진 무대 위엔 개와 사마귀도 함께였어요! 수풀에 가려져 있었군요.
연가시, 심장사상충: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맞춰) 쟤들은 괜찮아~. 신경쓰지 마.
두 벌레의 호언장담에 민달팽이는 찝찝한 수긍을 하며, 페이드 아웃.

???: 야! 이게 뭐야!!
누군가의 긴박한 외침으로 3막이 시작되었습니다. 소라게의 등껍질이 덩그러니 놓여있고 숲 속 친구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요. 모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만연한 가운데, 토끼가 소라게의 껍질 속에서 편지를 한 장 꺼냅니다.
토끼: '저는 떠납니다. 사요나라다. 하하.' 라고 써있는데...?
모두가 아쉬움과 실망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어요. 소라게 친구를 정말 많이 좋아했나봐요.
개: 아, 뭐야! 오늘 해물 좀 먹어보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토끼: 그러니까 내가 빨리 해야 한다고 그랬잖아!
사마귀: 넌 뭐든 빨리 하자고 하잖아...
... 뭐라구요?
민달팽이: 그게 무슨 소리세요? 다들 지금―.
심장사상충: 민달팽이, 너지? 우리가 해물탕 끓이려고 한다고 너가 알려준거지?
민달팽이: 네?
연가시: 후... 널 믿었는데...
민달팽이: 아뇨, 전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심장사상충: 달팽이한테 말한 게 소라게 귀에 들어갔나보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연인끼리 뭐 다 얘기하는거지! 그지?
사마귀: 그래, 이해해 줘야지 어쩌겠어. 달팽이가 같은 껍질 있는 사이라고 말했나 보다.
민달팽이: 걔가 뭘―.
연가시: 그래도 우린 널 나무라지 않겠어, 팽... 두 번 다시 우릴 실망시키지 않길 바라.
민달팽―.
토끼: 야! 이렇게 된 거 달팽이나 후딱 먹자!
ㅁ―.
: 그거 좋은 생각, 콜록, 이다. 가자. 가자. 
사마귀: 탕으로 먹자! 요즘 국물이 땡긴다.
―.
숲 속 친구들은 빠르게 달팽이를 찾아 달려갔어요. 그리고 민달팽이는 소리쳤답니다. 그들을 붙잡고자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렸답니다. 하지만 민달팽이는 민달팽이입니다. 그 누구보다 느렸죠. 민달팽이가 달팽이를 보았을 때는,
@: 버려진 껍질 속의 국물만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분노한 민달팽이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을까요? 아마 ― 아니, 분명히 ― 듣지 못 했을 거예요. 듣지 않으니까요. 무대에, 세상에, 민달팽이에게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달팽은 가만히 앉아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조용하고 쌀쌀한 적막이 파도처럼 철썩입니다.
"저는 말이죠. 울 수가 없어요."
달팽이 정말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눈물엔 소금기가 있다더라구요. 전 소금이 닿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런 생물이라... 그래서 이 곳에 오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달팽은 자신의 발에 달라붙은 백사장의 모래를 비비적거리며 씁쓸하게 웃었어요.
"바닷바람은 따끔따끔하네요. 참 저랑은 안 맞는 곳인 것 같아요."
자리에서 일어선 달팽은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를 보며 말했습니다. "그래서 더 울기 좋은 것 같아요." 말을 끝맺은 달팽은 지금까지 들어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천천히 바다를 향해 걸어갔답니다. 짭짜름한 바람에 온 몸이 저릿저릿하지만 계속해서 걸어갔어요. 멈추지 않고 걸어갔어요.
달팽에게 바다는 신기한 곳이었답니다. 하늘빛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작은 구름들. 작은 구름들이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함께 춤추자고 손을 내미는 곳. 달팽은 그 작은 구름들이 마치 천사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달팽은 세상에서 가장 깊고 푸르른 눈물을 흘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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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를 덮자 딱 한 가지 감상이 떠올랐다. 역시 그녀의 글들은 읽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Posted by 약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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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처럼 두꺼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 그 가느다란 빛줄기가 방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반짝이는 경계선을 기준으로 오른쪽엔 낡아 빠지고 언제 빨았는지, 아니 빨래를 경험해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이불이 특이한 침대 위에 돌돌 말려 있다. '공주님 침대'라고 하던가? 네 개의 기둥이 천개와 이어지고 베일이 내려와 가려주는, 그런 것. 차이점이 있다면 기둥 하나와 천개는 부러져 있고 장식조차 하나 없는 삭막한 몰골이라는 것이겠지. 겨울 나무처럼 앙상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욱 이 방에 어울리는 지도 모르겠다. 
노을빛 경계선의 왼편엔 책걸상이 하나 놓여 있다. 구겨진 종이 몇 개가 나뒹구는 가운데 손때 묻은 양장 노트가 눈에 띈다. 때가 타고 빛바랜 파란색 노트. 이 노트의 주인인 그녀는 '맛이 간 인간'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즐겨하는 행위 중 하나가 '동화'랍시고 노트에 적는 이상한 글들. 도대체 무슨 동화를 적어 온 것일까. 노트를 집어 들고 적당히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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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데굴, 데굴, 데굴.

어느날 문득 돌멩이는 생각했어요.
"도대체 살아 있다는 건 뭐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니 나뒹굴고 있는 돌멩이들이 많았어요. 생각하는 돌멩이는 주변의 돌멩이들에게 물었답니다.
"얘들아. 살아 있다는 건 뭘까?"
하지만 돌멩이들은 묵묵부답이었답니다. 하긴, 돌멩이가 말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 사실을 깨달은 생각하는 돌멩이는 '멍청한 돌멩이들 같으니...' 하며 혀를 차고, 답을 찾기 위해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굴러가자 녹색으로 가득한 곳에 도착했어요. 이끼와 들꽃, 잡초가 그 곳에 도착한 생각하는 돌멩이를 맞이해줬어요.
"광합성, 광합성, 호흡-!." "포자~!"
열렬한 환호에 머쓱해진 생각하는 돌멩이는 멋쩍게 물었어요.
"얘들아, 너희들은 왜 살아가니? 삶이란 뭘까?"
돌멩이의 물음에 식물들은 서로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곤 모두가 입을 모아 대답해줬어요.
"광합성." "호흡." "포자." "삼투-압."
식물들의 단호한 대답에 돌멩이는 깜짝 놀랐답니다. '살아 있으니까 살아간다고?' 돌멩이는 그런 단순한 대답을 답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무생물 같은 광물이었어요. 내가 그 생각을 단단히 고쳐주겠어, 하는 그 순간 돌멩이의 배가 간질간질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래를 보니 밟고 있던 이끼가 슬금슬금 기어올라 오려는 게 아니겠어요!
"포~~자."
"으악!"
돌멩이는 기겁을 하며 뒤로 굴렀어요. '살기 위해선 뭐든 하는 미친 녀석들이었어!' 생각하는 돌멩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굴러갔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굴러가는 돌멩이는 전방 주시 태만으로 하마터면 개미를 칠 뻔 했어요.
"야 이 새끼야! 눈을 어따 달고 다니는 거야!"
돌멩이는 자신에겐 눈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려다가 생각을 바꿔 질문을 했어요.
"개미야, 너는 왜 살아가고 있니? 네게 삶이란 뭐야?"
돌멩이의 물음에 개미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해줬어요.
"하하하,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데? 너한테 치여 죽으려고 사는 건 아냐. 꺼져, 나 바빠."
개미의 대답에 돌멩이는 더욱 질문을 참을 수 없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돌멩이가 처음으로 듣는 말을 했거든요!
"바쁘다니, 무엇 때문에 바쁘니? 혹시 그게 네 삶의 이유니?"
개미는 물고 있던 부스러기를 슬쩍 흔들며 말했습니다. 개미의 겹눈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해졌어요.
"일. 일한다, 일. 보면 모르겠냐."
"그렇다면 너는 일을 하기 위해 살아가는구나?"
"그건 아냐. 그냥 어머니가 시키니까 하는 거지."
"그럼... 어머니를 위해서 사는 거야,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거야?"
"어머니를 위해 할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내일은 일 하는 척하면서 산책이나 해야겠어. 어떤 정신 나간 돌멩이가 나를 깔아 죽일 뻔한 걸로도 모자라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해대는 통에 정신적으로 너무 '지쳤거든.'"
개미는 더듬이를 까딱이며 따옴표까지 표현해가며 대답해줬어요. 비꼬는 듯한 표정과 말투(그리고 페로몬)도 환상적이었죠. 배우고 싶을 정도였답니다. 돌멩이가 어버버하는 사이 개미는 제 갈 길을 갔어요. '이래서 체액이 안 흐르는 놈들은 상종을 하면 안 돼!' 라고 툴툴대는 개미의 말을, 순간 떠오른 생각에 사로잡힌 돌멩이는 듣지 못했어요.
'원래 삶이란 별 의미가 없는 걸까?'

"소년 소녀들이여, 꿈을 가져라!!"
불현듯 옆에서 소리를 꽥 지르는 통에 돌멩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새 돌멩이 옆엔 오리가 서 있었어요. 오리는 마치 염원하는 그곳을 향해, 지금이라도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갈 듯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돌멩이는 오리를 올려다보며,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는, 질문 아닌 질문을 했어요.
"오리씨는 무엇 때문에 살아가시는 거죠?"
왠지 존대말을 써야 할 것 같아서 돌멩이는 존댓말로 물었어요. 오리씨는 돌멩이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저 하늘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대답해주었어요.
"그건 내가 날아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란다, 꼬마야."
"오리씨는 그곳으로 날아가기 위해 살아가시는 군요!"
"그렇단다, 꼬마야. 난 그곳에 닿을 때까진 날개짓을 멈출 수 없어. 너도 언젠가 그런 순간이 올 거란다."
"...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오리씨의 삶은, 생명은 끝나는 것인가요?"
"껄껄, 너는 궁금한 것이 참 많은 아이로구나!" 오리씨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돌멩이를 쳐다봤답니다. 그리고 말했어요. "그곳에 도착하면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거란다. 생명이 다 할 때까지 내게 날아갈 곳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말을 맺으며 오리씨는 날개로 돌멩이를 따뜻하게 쓰다듬어주었답니다. 오리씨를 올려다보는 돌멩이는 결심이 섰다는 표정으로 오리씨에게 말했어요.
"좋아요, 오리씨. 다 좋은데... 왜 날 꼬마라고 부르죠? 나이는 내가 더 많을 텐데요?"
꽥? 어이없는 울음 소리를 내며 오리씨는 돌멩이에게 말했습니다.
"나이는 무슨 돌멩이가 나이야? 아이고, 누가 보면 생물인 줄 알겠다, 자식아."
"나도 만들어진 시대라는게 있는 돌이에요. 존댓말은 존중의 표시예요. 내가 어리다는 게 아니고." 사실 그냥 분위기를 타서 존대한거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겠죠.
"마! 떽! 어른한테 그러면 안 돼!"
"너 어른 아니라니까?"
"쓰읍! 혼나요, 혼나~."
"야, 내가 너 알까고 나오는 것도 봤――!"
오리씨는 듣기 싫다는 듯 날개로 돌멩이를 내쳤어요. 그리곤 데구루루 굴러가는 돌멩이를 향해 외쳤답니다.
"얼마 전까지 죽은 듯이 가만히 있던 녀석이 뭐가 어른이야! 이제 막 굴러다니기 시작한 놈이! 지나가던 개도 기가 차서 웃겠다!"
'파하핫!!' 어디선가 지나가던 개가 웃는 소리가... 아니었어요! 날벼락이 떨어지는 소리였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져서 오리씨는 베이징덕씨가 되어버렸어요. 구르기를 간신히 멈춘 돌멩이는 김이 솔솔 나는 베이징덕씨를 넋놓고 바라봤어요. 아마 윤기가 흐르는 그 껍질에 반한 것이겠죠.
"하하! 꼴좋다, 생물'이었던' 것아."
반하진 않았나 봐요. 왜지? 이해가 안 가네. 돌멩이는 군침 돌게 만드는 베이징덕씨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답니다. 따옴표에 맞춰 딸깍거리면서 말이죠. 생각하는 돌멩이는 자신이 당한 걸 바로 남에게 쓸 수 있을만큼 응용력 뛰어난 돌멩이였답니다. 하지만 환상적으로 캐러멜라이즈된 베이징덕씨는 개의치 않아 했어요.
"그래, 이제 내 비행은 끝났구나. 하지만 내겐 죽음조차 막을 수 없는 욕구가 샘솟고 있다!"
사랑스런 베이징덕씨는 맛있는 냄새를 폴폴 풍기며 소리쳤습니다.
"위너 위너 치킨 디너!!"
그리곤 인가를 향해 달려갔어요. 돌멩이는 '치킨은 닭이야, 이 새대가리야.' 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베이징덕은 머리가 없었어요. 새대가리마저 없으니 납득할 수 밖에 없죠.
그리고. 
조금 더, 조금 더 조금 더 생각해보자 지금껏 품어 왔던 의문이 풀렸답니다.
궁금증을 해결한 돌멩이는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도, 질문하지도, 스스로 구르지도 않았어요.
생각하는 돌멩이는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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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를 덮으며 떠오른 생각은 그저 한 가지 였다. 역시, 소문대로 그녀는 실없이 망언할 뿐이라고.



Posted by 약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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