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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2.14 [연속]또 죽었다, 로제리! 1
-지난 편의 로제리, 요약 갑니다~!

평범한 고등학교 4학년(재수생ㅎ)이었던 김**은 갑작스럽게 이세계로 소환된다! 갑작스런 이세계 소환도 모자라서... 뭐?! 여자아이의 몸이 되어버렸다구~?! 말도 안돼~~!!
하지만, 상황(과 자신의 몸)을 파악할 여유도 없이 덩치 큰 남자에게 붙잡혀 간 그는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이쪽 세계에서 빈곤하고 어린 가정부, '로제리'가 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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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이-발..."
어린 소녀의 입에서 찰진 욕지거리가 뱉어져 나왔다. 소환 이전의 소녀가 어땠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찌됐든, 어린 가정부 로제리는 오늘도 힘차게 입이 마르도록 욕을 중얼거리고 있다.
"뭔 놈의 집구석이 시장도 이렇게 멀고, 시발... 무거워. 집주인놈은 왜 갑자기 멜론을 처먹고 싶다고... 아오!"
이것저것 떠오르는 족족 로제리의 작은 입은 그것들을 물어뜯고 되는 대로 씹어서 걸은 언어로 뱉어냈다. 이쪽 세계로 넘어온 지도 얼추 1개월이 지났다. 그간 꽤 많은 것을 깨달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이고 ― 이젠 '로제리'가 된 그의 말마따나 ― 좆같은 것들이었다.
소녀 로제리, 그녀는 어느 저택에 가정부로 머물고 있는 아이였다. 가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고용인들의 반응을 떠본 바로는 없는 듯했다. 근무 환경(이라 해야할지 주거 환경이라 해야할지 모르겠지만)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가끔 이렇게 집주인의 변덕으로 갑작스런 심부름을 가야할 때 가장 막내인 자신이 수고해야 한다는 점은 싫지만, 나머지는 그냥 저냥 평범했다. 오히려 고용인들과의 친분이 이미 어느 정도 있어서 편하다면 편한 면도 있었다. 그 '익숙함과 편안함'조차도 좆같은 것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랄까.



"하하하, 이번엔 '이세계인'이야? 재밌네~." 
이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다가 겨우 얌전해진 ― 로제리에게 익숙히 대꾸한 남자는 '라비주니어 다크젤'이란 이름의 고용인이었다. 라비는 '로제리'가 된 후 가장 처음 만난 고용인으로, 건강미가 느껴지는 흑갈색 피부와 은빛 단발이 인상적인 훤칠한 청년이었다. 특히 라비의 은발은 꽤 인상 깊었다. 그도 그럴게, 그는 자신을 들쳐 메고 가는 라비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한동안 대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네. 지금, 이 자세."
덜렁덜렁 라비의 어깨에 메여있는 로제리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널 이렇게 메고 다닌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로제리씨네 세계 이야기는 아직입니까?"
라비는 묘하게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답을 하며 어깨에 올려진 로제리의 등허리를 토닥였다. 그것이 안심을 독려하는 건지 이야기를 재촉하는 것인지 헷갈렸지만, 로제리는 대충 후자로 받아들이고 '저쪽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그 자체를 설명한다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로제리는 더욱 신중을 기해서, 말그대로, '진실'을 진실되게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이어진 라비와의 대화(라는 이름의 설득)는 로제리에게 이쪽 세계뿐만 아니라 본래 살고 있던 세계에 대해서도 새로이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었다. 사고를 언어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명확해지는 것들은 많다. 가령 예를 들자면...
"네 원래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항국'에서 뭘 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고, 네가 말하는 최신 기술이라는 건 마법으로 다 가능한 것들이고... 이번 이야기는 허술하다, 로제리!"
"..."
라비는 그렇게 '빈틈투성이 망상'으로 치부하며 소탈하게 웃었지만 로제리는 침묵 깊이 가라앉아 자신의 기억을 추궁하고 있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당연히 있어야 할 '기억'들이 훼손되어 있었다.
부모의 얼굴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의 이름과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 애시당초 학교를 다니긴 했었는지 의문스럽다. 무엇 하나 또렷한 이미지가 없다. 로제리의 기억은, 그 기억의 몰골은, 어린 아이가 엉터리로 만든 헝겊 인형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로제리는 자신이 그저 '기억의 모순을 발견하고 놀란 기분' 밖에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질겁했다. 나는 그토록 현생에 애정이 없었던 것인가? 이토록 자신의 삶에 애착이 없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기묘한 감정이 흐르는 정적. 로제리의 침묵이 자신의 타박 탓이라고 느껴진 것일까. 라비는 로제리 향한 혼잣말로 정적을 밀어내려 했다.
"그래도 이번엔 위험해 보이지 않는 컨셉이라서 다행이야. 검은마법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심정도 이해는 하지만... 솔직히 너만큼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하하."
"..."
"생각해보면 코케트도 심술궂어. '검은마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책에 적힌 걸 알려주고, '나는 로제리를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대해주고 있을 뿐이야' 라니... 정작 책임감이 필요한 건 코케트라구."
"..."
"난 솔직히 '악마를 소환'하러 갔다길래 혹시나 싶어서 싸울 준비도 했는데, 다행히 실패했나 보구나."
라비는 허리춤에서 탈칵거리는 검집의 흔들림과 로제리의 무게를 음미하며 안심하는 미소를 지었다.
"...검은...마법? 악...마, 뭐?"
침묵 속에서 자맥질하던 로제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대체 —————.
한 순간이었다. 라비의 발 밑에는, 정말 우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도, 바나나 껍질이 놓여있었고 라비는 힘찬 발걸음으로 그것을 밟았다.
미끄덩, 콱.
라비는 우스꽝스러울만큼 뒤로 고꾸라졌고 로제리 또한 그 촌극을 피하지 못했다.
지면이 들이닥친다고 착각한 로제리는 그 착각을 깨닫기도 전에 안면을 그대로 흙바닥에 꼬라박았다. 어느 정도의 높이와 어느 정도의 무게, 어느 정도의 속도가 어우러져서 그녀의 얼굴을 흙알맹이로 갈아내버렸다. 코뼈를 시작으로 으스러지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은 피와 살점과 몇 개의 이빨을 튀기며 함몰했다. 그러고도 만족되지 못한 충돌의 여파는 그녀의 경추를 짓이기며 박살을 내고, 목을 비틀어 접고서야 잦아들었다. 땅에 꽂힌 얼굴은 그대로 둔 채, 넘어진 라비의 몸과는 반대로 로제리의 몸이 발라당 넘어졌다.
그녀의 목에서는 단말마의 비명 대신 '뿌드득' 거리는 어그러진 소리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로드' 하시겠습니까?》
전신의 상실감과 두부 전체를 감싸는 죽음의 촉감, 붕괴에 가까운 고통 속에서 너무나도 생뚱맞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라기보단 잊혀졌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온 듯한 감각, 하지만 그 명료함과 선명함이 '목소리'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 목소리의 울림이 로제리를 휘감아 옥죄고 있던 고통을 서서히 지워냈다. 얼떨해 하는 로제리에게 모든 상황을 재차 확인 시켜 주듯 목소리는 한 번 더 울려퍼졌다.
《'로드' 하시겠습니까?》
〈...예.〉
선택 없는 선택지를 들이밀고 있다. 어디선가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다 싶었는데, '야간자율학습' 신청서가 비슷한 맥락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있는데 왜 귀찮게 물어보는 걸까 싶은건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 없는 기분이다.
〈'로드 하실거잖아요?'라고 물어보지 그러냐.〉
그런 로제리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이 목소리는 수순을 따라 진행을 요구할 뿐이었다.
《로드하겠습니다. '로제리, 리셋해' 라고 말하십시오》
'왜 로드를 하는데 리셋이라고 말하라는 걸까.' 같은 의문이 스쳐지나가고, 로제리는 ― 정확히는 그녀 안에 있는 그는 ― 요구받은 대답을 돌려준다.
〈'로제리, 리셋해.'〉
《리셋》


아무 것도 아니었던 무無가 로제리라는 그릇 안에서 의미를 돌려받고 생명을 되찾는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다. 적당히 말하자면 로제리 모양 튜브에 정신이 빨려들어가서 부풀어오르는, 그런 감상을 느끼게 하는 부활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로제리는 확신했다.
"저쪽에서 넘어 왔던 곳이구만."
기억의 혼란은 커녕 위화감 마저 없는 너무나도 안정적인 부활. '어디서 이런걸 사망귀환이라고 하던데 나도 그렇게 부를까?' 같은 실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라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리!"
아, 그랬었다. 라비는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들어서 검은마법을 방해하려 했었다. 건장한(그리고 낯선) 남자의 저돌적인 달리기는 쪼만한 소녀의 눈높이에선 흉흉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로제리는 도망쳤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라비! 기다려 봐! 내가, 뿌어억!!!"
지금이라도 라비의 돌진을 막을 수는 없었나보다. 라비는 마치 지금이라도 당장 로제리의 발 밑에 있는 폭발물이 터질 것 같은 기세로 달려들어 풀밭으로 다이빙했다. 물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새들의 지저귐조차 멎은 숲의 정적 속에서 로제리는 말했다.
"내가... 내가 터질 뻔 했잖냐."

"아~ 정말 무사해서 다행이야."
숲길을 걸어가며 라비는 연신 안도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로제리의 손을 잡고 있는 라비의 손도 감정을 표현했다. 혹시나 도망칠 것을 염려한 라비는 로제리를 업고 가려 했지만 로제리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손을 잡고 가는 것' 정도로 타협을 봤다. 기쁨과 안도로 씰룩대는 청년의 손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을 믿지 않더라도 이야기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가 구하고 싶었던 로제리가 아니야.' 그런 마음으로 로제리는 입을 열었다.
"라비."
기쁨이 묻어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라비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로제리를 돌아봤다. 무구한 미소가 갈고리처럼 로제리를 꿰었다. 전달해야 할 진실과 함께 끌어올려진 것은 방향 모를 미안함이었다.
"내 말, 믿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얘기해야만 하고! 그리고... 믿어 주길 바라."
로제리의 진지한 어조에 라비는 걸음을 멈추고 로제리를 향해 돌아섰다. 그렇게 돌아서서 바라보는 라비의 온화한 시선이 거북하여 로제리는 눈을 돌리고 잡고 있던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라비는 쥐고 있던 손 끝을 지그시 누르며 그것을 막았다. 그 손 끝에서 전해지는 건 도주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신뢰감. 막역한 유대와 신뢰가 로제리의 가슴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로제리는 고통의 몸부림치듯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감정마저 터져나와 진실을 내질렀다.
"난 너가 알고 있던 '로제리'가 아니야! 아예, 아예 이 세계의, '래즈카이'의 사람이 아냐! 터무니 없다 생각해도...! 난, 난 로제리가...!!"
거칠게 떨려오는 호흡에 말이 끊어졌다. 벅찬 호흡과 함께 열기가 얼굴을 덮친다. 이윽고 뜨거운 열기가 간지럽게 방울져서 소녀의 뺨을, 흙바닥을 적셨다. 눈물에 가장 당황한 건 로제리 본인이었다.
"어라...?(훌쩍) 나 울어?(쿨쩍)"
만화에서나 보던,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에 놀라 두 눈을 소매자락으로 누르는 로제리의 머리 위로 라비의 손이 올라왔다.
"로제리 말이면 믿지.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 라비의 손은 조금씩 움직였다. 쓰다듬듯이. 타이르듯이. 어르듯이. 토닥여 주듯이.
"이 멍청아! 그러니까 난 로제리가 아니―――!
로제리는 머리를 쳐들며 라비에게 대꾸하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로제리의 발 밑에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지만, 바나나 껍질이 놓여있었다. 로제리는 '바나나를 밟은 것'이 되었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미끄덩, 꽝.

'잠에서 깨어날 때면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것 같다'는 서술을 종종 책에서 본 적 있었다. 로제리(가 된 그)는 오늘 처음으로 그런 기분을 느꼈다. 폭풍우가 뒤흔드는 깊은 바다에서 간신히 떠오르는 '그런' 느낌.
"푸헥! 컥, 푸하-악!!"
숨통이 원하는 것을 거칠게 들이키며 벌떡 일어난 로제리의 몸은 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코로 물이 들어가 콜록대는 로제리의 옆엔 한 소녀가 서있었다. 소녀는 권태스런 표정으로 로제리를 내려다보다가 '이제야 일어나네.'라 말하며 들고 있던 물통을 적당히 바닥에 팽개쳤다. 나무로 된 벽에 슬쩍 기대 선 소녀는 기침이 잦아들지도 않은 로제리에게 대뜸 말을 걸었다.
"야. 너 누구야?"
로제리와 소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허름한 창고, 마주보는 소녀는 창문의 빛을 비스듬히 등지고 있었다. 소녀의 검붉은 머리칼이 빛을 머금고 새빨갛게 반짝인다. 소녀의 농회색 눈이 그림자 속에서도 빛나는 것 같다. 불꽃을 품은 잿더미, 그것이 그 소녀의 첫인상이었다.
로제리는 소녀에게서 눈을 돌리고 축축히 젖은 담요를 쳐다봤다. 아직도 끼얹은 물이 몸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턱 언저리에 맺힌 물방울조차 더이상 떨어지지 않을 때쯤 로제리는 겨우 입을 열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누군지."
"...좋아."
그렇게 말한 소녀는 일어나서 지푸라기가 뒤섞인 잡동사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건가?' 하고 꺼낸 물건을 뒤로 던지길 두어 번, 불쑥 꺼낸 것은 거무튀튀한 한 권의 책이었다. 책에 붙은 지푸라기를 툭 털어내곤 곧장 책을 펼친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다 촤라락 넘기고, 앞으로 되돌아가길 몇 번. 소녀의 손가락이 멈췄다가 문장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8장 악마 소환 마법. 소환 마법 중에서도 악마 소환은 고도의 기술과 섬세함을 요하는 고등 마법이다... ... 악마 '스타페스 엑시디움'. 이 악마의 주식은 시간이다. 사역을 하게 된다면 스타페스 엑시디움의 시간 섭취를 조절하여 시간을 다루는 것이 가능해진다. 허나 스타페스 엑시디움은 영악하기에 사역에 성공했다하여 주의를 게을리하면 안 된다. 사역자의 시간을 몰래 훔쳐 먹어 노화로 죽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 혼이 달아나지 않은 생물의 붉은 피... 육체에 묶인 영혼... 도마뱀꼬리, 양파, 당근 어쩌고저쩌고."
텁, 책을 덮으며 소녀는 "이거네."라 말했다.
"뭐가... 이거라는 거야...?"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한 직후부터 로제리는 또다시 혼란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소녀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기는 했지만 그저 눈만 뜨고 있었을 뿐 넋을 놓고 있는 상태였다. 해서, 소녀의 낭독 또한 들리지 않았다.
"네 이름. 스타페스 엑시디움 일거야."
"아- 아니, 아냐. 내 이름은 김... 김 뭐시기였다고."
"그럼 김 스타페스 엑시디움인가 보네."
"아냐, 맹세코 그건 아냐!"
소녀는 로제리를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창고 구석에 책을 두더니 잡동사니들을 발로 걷어차서 책을 숨겼다.
"어쨌든 내 이름은 코케트야."
소음과 함께 피어난 먼지를 피해 몇 걸음 물러선 코케트는 잡동사니와 먼지로 뒤덮힌 창고 한 켠을 바라보며, 그렇게 고했다.



'뭐 이딴 지랄'(오르막길)을 오르며 '좆같은 초록색'(멜론)을 들고 '그지같은 시부럴'(저택)으로 향하던 로제리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무시하고 싶어도 헬스장의 덜덜이가 생각나는 이 무지막지한 진동은 무시할 수가 없다. 양손의 짐을 내려놓을만한 길가에 멈춰서서 '전가기'를 꺼냈다. 이름만 조금 다르지 그냥 전화기다. 대부분의 어휘는 이전과 똑같은데 가끔 이런 식으로 뜬금없이 다른 어휘가 사용되곤 한다. 아주 제멋대로인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나 지금 오르막..."
`주인어른의 기분 변경~. 멜론에서 무화과로 변경. 그럼 수고.`
대화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통화였지만, 납득한다. (주인어른의 기분이 또 바뀌기 전에)빠르게 다녀올 수 있게 해주는 코케트 나름의 배려(?)인 것이다. 허나 그것이 허망함을 달래 주진 못한다. 한숨 한 번, 욕 한 번, 다시 욕 한 번.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고 로제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상쾌함이 느껴지는 맑고 푸른 하늘은 포근한 햇살로 가득하다. 나쁘게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렇게 좋은 날씨, 산책할 시간이 늘었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렇게 받아들이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무거웠던 짐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작은 미소를 한 입 물고 다시 시장을 향해 내려간다.
미소에 화답해주 듯, 멜론도 언덕길 아래에서 박살난 두 쪽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그래, 나도 반갑다. 이 좆같은 세상아."
베어 물고있던 미소에선 떫은 맛이 났다.



Posted by 약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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